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스쿠 다 가마 (문단 편집) === 4차 원정의 종결과 그 후의 전개 === 하지만 자모린은 평화조약을 미끼로 바스쿠 다 가마를 유인하는 등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매복공격에 이은 항구에서의 치열한 공방전 결과 바스쿠 다 가마가 탈출하면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바스쿠 다 가마는 사로잡은 브라만 3명을 또 협박성으로 돛대에 높이 매달았고, 자모린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서신과 시체를 뗏목에 실어 내려보냈다. 포르투갈에 대해 원한이 사무쳤던 자모린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휘하 제독에게 함대를 끌어모으라고 지시한다. 아랍 용병 등 끌어모을 수 있는 배는 다 끌어모은 결과 아랍 대형선 20여척, 삼부크 수십척과 소형 갤리선 수백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급조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바스쿠 다 가마는 매복에서의 탈출 이후로 아무나 걸리는 대로 한번 박살낸다는 식으로 벼르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함대는 캘리컷 해전에서 포르투갈 카락선 16척에 개박살이 나고 만다. 그만큼 서유럽의 선박, 화포기술과 인도양의 테크 간의 격차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원정의 목표였던 캘리컷과 자모린을 불평등조약으로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함대는 칸나노르와 코친에 거점을 마련해둔 것과 어마어마한 향신료를 털어온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4차 원정 함대는 1503년 7월에 리스본으로 복귀했다. 귀환한 함대는 후추 1700톤, 계피와 말린 정향, 메이스, 육두구 400톤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향신료를 실어 왔고 떼돈을 벌었다. 물론 이게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정당하게 판매하고 교환해서 얻은 성과는 절대 아니며 포격과 협박, 나포, 약탈, 즉 해적질로 삥뜯어온 결과물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후평하기에는 우호세력 코친과 칸나노르에 마련해놓은 거점은 자모린의 위협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이후 자모린은 수만의 군대를 동원해 코친을 공격하며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려는 시도[* 포르투갈이 일시적으로 퇴각할 정도로 심각한 위협이었으나 5차 함대가 도달해 불쇼를 벌이면서 위기는 해소된다.]를 했으니 매우 정확한 지적이었다. 따라서 바스쿠 다 가마는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파견할 것과 강력한 함대가 주둔해서 순찰함으로서 영구적인 지배를 해야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함으로서 항해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 포르투갈 함대와 후임 제독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는 바스쿠 다 가마의 조언대로 코친과 칸나노르 같은 인도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해 알을 박고 지속적으로 인도 세력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삥을 뜯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포르투갈인의 교회나 상관이 생기면 현지인들과 자연스럽게 마찰이 생기게 된다. 바스쿠 다 가마를 비롯한 포르투갈 탐험가, 선원이나 선교사들은 현지의 풍습에 대한 이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미개한 불신자 취급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로 바스쿠 다 가마 함대의 선장 한 명은 무슬림을 붙잡아서 채찍으로 신나게 후려패다가 포로가 실신하자 입에 돼지고기 조각을 쑤셔박아 능욕한 바가 있었다.] 이런 태도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포르투갈인이 살해당하거나 건물이 파괴되면 이를 명분삼아 불바다를 만드는 게 포르투갈의 방식이었다. 무엇보다도 포르투갈이 자의적으로 발행한 통행증인 카르타스 미소지 선박에 대한 해적질이 인도인들의 크나큰 원한을 샀다. 상인들은 자모린 같은 통치자들에게 호소했고 그렇잖아도 포르투갈에 쌓인 감정이 증오 수준이었던 자모린은 주기적으로 포르투갈에 복수전을 펼쳤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인도 세력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며[* 깽판이 심각했던 나머지 인도 뿐만 아니라 오스만, 맘루크까지 개입할 정도였다.] 공성전과 해전을 벌였다. 물론 포르투갈이 대체로 크게 승리했다. 특히 자모린이 영혼까지 군사를 끌어모은 결과물인, 인도와 아랍, 오스만의 연합 함대 200척이 대파당한 1506년의 칸나노르 해전과 1507년의 칸나노르 공성전[* 칸나노르와 캘리컷이 연합하여 포르투갈이 칸나노르에 건설한 안젤로 요새를 포위공격한 사건. 최초에 칸나노르는 캘리컷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포르투갈에 우호적이었고 교역도 허가했다. 그러나 통치자의 사망으로 칸나노르 왕국을 지배하던 콜라티리 왕조의 승계 문제가 일어났는데 이때 자모린이 개입하여 통치자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쉽게 말해 자기편을 왕으로 꽂아준 것이다. 자모린 덕분에 자리에 오른 새 통치자는 자모린에게 보답할 수 밖에 없었고 포르투갈 공격에 동의하게 되었다.]이 결정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